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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대리입니다. 오늘 알아볼 내용은 거란의 1차 침입에 대한 내용입니다. 최근 KBS2에서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으로 '고려와 거란 전쟁' 이라는 드라마가 새로 나왔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26년간 이루어진 전쟁을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드라마를 보다보니 거란의 1차침입은 이미 끝난 시점이고 그 이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란의 1차침입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시대적 배경상황
서기 942년에 거란이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낙타 50을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태조왕건은 같은 민족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거란이 보낸 낙타 50필을 만부교라는 다리 밑에 묶어두고 모두 굶어 죽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고려와 거란의 외교는 단절 및 적대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이 듬해에 지어진 「훈요십조」가운데서도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지목하여 그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경고하였습니다.
서희장군의 탄생
942년, 왕건이 거란의 낙타를 굶겨 죽이던 시기에 서희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광종 대의 대쪽 재상인 서필이었으며, 서희의 집안은 부유하고 풍요로웠습니다. 서희는 19살이 되던 해에 급제를 하였고, 이 후에도 놀라운 발전을 이루며 승진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12년 후, 내의성 시랑의 벼슬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서희는 우리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외교관으로 평가되며, 그의 업적과 뛰어난 인재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
제 1차 고려 거란 전쟁은 993년(성종 12년) 10월에 발발한 전쟁으로, 소손녕이 이끄는 80만명의 거란 대군이 고려를 침공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고려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거란과의 교류를 촉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긴 전, 거란은 압록강 부근의 여진에게 고려에 대한 침입 계획을 알리는 통고를 보냈습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박양유와 서희를 포함하여 이를 막기 위한 대비책을 세우고, 성종은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러나 봉산군이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면서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와 전략을 재조정해야 했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할지론 등의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서희와 이지백 등은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에 성종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화친을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고려의 국토와 구구려의 역사적 연관성을 주장하며, 거란의 침략을 비난했습니다. 서희는 여진이 고려의 옛 영토를 훔치고 있으며,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여진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여진을 쫒아내고 고려의 옛 영토를 되찾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습니다.
고려는 결국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 통주, 구주, 곽주, 용주, 철주 등의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거란과의 교류를 촉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거란은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고, 고려는 강동 6주를 보유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실제로 고려는 송나라와 비공식적인 교류를 계속하며, 거란은 강동 6주의 가치를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의 외교담판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거란의 2차 및 3차 침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보면 좋은 내용들
1. 거란의 2차 침입
2. 거란의 3차 침입과 귀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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