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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대리 직장 살아남기 입니다. 오늘 알아볼 내용은 거란의 1차와 2차 침입에 이어서 거란의 제 3차 침입입니다. 최근 방영하고 있는 KBS2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현종과 강감찬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고증들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먼저 역사적 내용을 공부하고 시청을 한다면 좀더 재미있고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란의 제 1차 침입과 제 2차 침입 내용은 아래를 참고하세요.

 

1. 거란의 제 1차 침입과 서희의 외교술

 

고려 거란 전쟁 사전 예습(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의 외교술 그리고 강동 6주)

안녕하세요. 이대리입니다. 오늘 알아볼 내용은 거란의 1차 침입에 대한 내용입니다. 최근 KBS2에서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으로 '고려와 거란 전쟁' 이라는 드라마가 새로 나왔습니다. 고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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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란의 제 2차 침입(강조의 정변과 양규의 활약)

 

거란의 2차 침입(강조의 정변, 양규의 활약) 정리(고려 거란 전쟁 공부)

안녕하세요. 역사여행 떠나는 성우의 여행생활입니다. 오늘 알아볼 내용은 거란의 2차 침입에 대한 내용입니다. 최근 KBS2의 '고려와 거란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새로 시작을 했는데 고려와 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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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

거란은 두차례에 걸친 고려침략이 실패한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고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거란은 고려에 두가지 무리한 요구를 제시했습니다. 첫번째는 현종이 거란의 조정에 나와 예를 올릴 것이었고, 두번째 요구는 강동 6주를 다시 내놓을 것이었습니다. 거란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시 침략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이에 고려는 현종이 병으로 인해 거란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 거부를 하였고, 강동 6주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거란은 이것을 빌미로 하여 고려를 침입하였고, 제 3차 고려와 거란 전쟁이 되었습니다.

 

거란의 제 3차 침입

거란은 본인들이 요구했던 두가지요구가 받아들여 지지 않자, 고려의 대응하기 위해 다시 침략하기로 하면서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침략을 하면서 고려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흥화진(현재 평안북도 의주)을 다시 포위했지만, 고려군은 거란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이와 같은 소모적인 전투가 계속 되던 중, 거란은 마침내 소배압(거란의 1차 침입때 서희와 협상을 벌였던 소손녕의 형)이 지휘하는 10만 군사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

 

강감찬 인물 알아보기 - 업데이트 예정

 

 

고려 거란 전쟁 강감찬 인물 일대기 알아보기

안녕하세요. 역사여행 떠나는 성우의 여행생활입니다. 오늘 알아볼 내용은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영웅 강감찬의 일대기입니다. 요즘 고려 거란전쟁 드라마로 최수종님이 연기하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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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씀드렸 듯이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거란군이 고려를 세번째로 침공을 했고, 고려의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와서 흥화진에서 처음 거란군과 맞섰습니다. 이때 강감찬은 지혜로운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흥화진 상류에 쇠가죽으로 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었다가 거란군의 주력부대가 강을 건널때 갑자기 둑을 터뜨려 물을 방출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초반의 전투에서 패배한 거란군은 사기가 꺾였습니다. 

이후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정면 싸움을 피하고 산간 지녁을 통해 개경 근처까지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전투보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더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개경의 방어가 튼튼하여 거란군은 더 이상 진군 할 수 없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후퇴하던 거란군이 압록강 근처의 귀주에 도착하자, 고려군은 근처의 귀주에 도착하자, 고려군은 근처 성을 지키던 병력을 모두 모아 총 공격하여 거란군을 전멸시켰습니다. 거란 10만 군사 중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거란은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생각을 버리고, 고려와 거란은 화해했습니다.

귀주대첩 그 이후에 대해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둔 강감찬은 고려의 안전을 위해 적절한 군사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입할 가능성을 걱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강감찬은 현종에게 찾아가 제안했습니다. 강감찬의 의견을 수용한 현종은 개경 주변에 나성 (나성은 도시 전체를 이중으로 둘러싼 성을 의미) 을 쌓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또한 강감찬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을 것을 주장했는데, 천리장성(천리()[약 392km)은 대략 천리에 달하는 긴 성으로,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동해안까지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귀주대첩 이후로 고려는 120년동안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한편,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100년동안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으나, 결국 쇠퇴하며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거란의 쇠퇴의 주요 원인은 역시 고려와의 전쟁패배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감찬은 1031년 향년 83세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낙성대에는 강감찬의 일대기와 공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유허비가 세워졌습니다.